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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초이

8 15일이 되면 수많은 인파와 많은 글귀가 쓰인 벽으로 사람들이 모여든다. ‘빅토르 초이의 벽이 있는 모스크바 아르바트. 그가 태어나 활동했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추모객 수백 명이 그의 무덤을 찾아 공식 추모행사를 가지고 추모하는 벽에서도 수백 명이 모여 그의 사진 앞에 꽃다발을 바치고 촛불을 밝히며 그가 불렀던 노래를 함께 부른다. 이미 빅토르 초이라는 가수가 하늘로 떠난지 30년이 넘어가지만 그의 노래는 아직도 10대들이 부르며 러시아의 많은 사람들에게 대중가요를 알러 준 그 장본인이다.

빅토르 초이라고 부르지만 한국사람들은 빅토르 최라고 부른다 러시아 발음상 초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고려인3세라고 할 수 있으나 그는 러시안인이다. 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슬하 무녀독남 외동아들로 출생해서인지 전체적인 분위기는 큰 키에 동양사람으로 보이나 눈동자가 파란색이라 동서양의 매력을 갖추고 있다.

 

그는 17세 때부터 노래를 작곡하기 시작했으며, 초기 곡들은 레닌그라드 거리에서의 삶, 사랑과 친구들과의 어울림 등을 다루었지만 노래의 주인공은 주로 한정된 기회만이 주어진 채 각박한 세상을 살아나가려는 젊은이였다.

 

이 시기에 그는 보일러 수리공으로 일을 하면서 파티 등의 장소에서 자신이 만든 곡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한 연주를 록 그룹 아쿠아리움의 멤버였던 보리스 그레벤시코프가 보게 되어, 그레벤시코프의 도움으로 그는 자신의 밴드(밴드명:키노)를 시작하게 된다.

 

밴드 활동 후 대부분의 곡은 소련의 젊은이들을 향한 외침이었으며, 능동적으로 나가서 국가를 변화시키라고 호소를 하며 몇 개의 노래는 소련을 옥죄고 있던 사회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이 앨범은 빅토르 초이와 키노를 러시아 젊은이들의 영웅으로 등극시켰다

 

이 시기에 록은 레닌그라드에서만 태동하고 있던 언더그라운드의 한 움직임이었으며, 음악 차트 등의 대중 매체들은 모스크바의 팝 스타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소련 정부는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가수들에게만 허가를 내주었고,집과 녹음실 등 성공이 필요한 많은 것들을 제공하여 길들였다.

 

그러나 록 음악은 그 당시 소련 정부에게 너무도 마땅치 않은 음악이었다. 록은 자본주의 진영의 록 그룹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 외에도 젊은이들을 반항적으로 만들었으며, 의사 표현의 자유 등 표현 관련 가치를 중시했다.

 

소련 정부와 대립하기가 수위가 높았졌는지 빅토르 초이는 갑자기  의문의 교통사고로 27세라는 꽃다운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그가 상트페테르부르크 보구슬라프스크 묘지에 묻히던 날 수천 명의 인파가 몰렸고 10대 팬은 자살소동을 벌이고 극성팬들은 모스크바 아르바트 거리에초이의 벽을 세웠다. 많은 사람들이 빅토르 초이를 잊지 못할 것이다 그의 노래는 영원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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